"낮은 자세로 다시 시작" 정동영의 도전과 좌절


"진실의 편에 서서 끝까지 믿고 지지해준 국민들에게 감사드린다".

12월 19일, '후보' 정동영의 마지막 기자회견은 열 문장 내외로 짧고 간결했다. 당산동 당사 곳곳에는 '진실이 거짓을 이긴다'는 문구가 붙어있었다.

"반드시 기적은 일어날 것"이라던 당초 기대와는 다른 결과를 손에 쥐었지만, 정동영의 표정은 차분하고 담담했다.

"국민의 선택을 겸허히 받아들인다"고 운을 뗀 그는 이명박 당선자에게도 "나라를 위해 잘해달라"고 당부했다.

전북 순창 태생인 정동영은 18년간 한 방송사에 근무하며 앵커까지 지낸 기자 출신이다.

그런 그가 정계에 입문한 건 지난 1996년. 당시 15대 총선을 앞두고 야당이던 새정치국민회의에 영입된 정동영은 전국 최다득표를 기록하며 화려한 정치 인생을 시작했다.

정치 연륜이 짧은 그가 정계의 핵심 인사로 부상하게 된 계기는 역시 '정풍 운동'.

김대중 전 대통령의 최측근이었던 권노갑 전 민주당 고문을 정면 공격하고 나서면서, 그는 정계의 태풍으로 급격히 떠올랐다.

정동영의 또다른 '모멘텀'은 역설적으로 그가 패배했던 지난 2002년 민주당 경선이다.

당시 이인제 후보 등의 경선 비토 분위기에도 불구, 끝까지 '경선 지킴이'를 자처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참여정부의 2인자'로 우뚝 섰다.

이어 열린우리당 창당을 주도한 정동영은 17대 총선에서는 절반이 넘는 152석을 확보하며 '거대 여당'을 일궈냈다.

집권 여당 의장을 두 번이나 지내며 조직력을 쌓았고, '몽골 기병론'으로 인상적인 돌파력도 보였다. 지지율도 한때 솟구쳤다.

2004년 통일부장관으로 입각한 정동영은 이듬해인 2005년 6월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면담했다.

당시 이끌어낸 9.19합의와 개성공단 준공은 그가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는 '트레이드 마크'다.

그러나 정동영의 '승승장구'를 뒷받침했던 '황태자' 이미지는 결국 정동영의 발목을 잡는 '독'이 됐다.

"일단 바꾸고 보자"는 '반(反) 노무현' 정서 앞에 정동영이 내놓는 모든 것은 "그 밥에 그 나물"로 인식됐다는 평가다.

주변에서 "실기(失期)했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작년 지방선거 대패 직후 곧바로 노무현 대통령과 선을 그었어야 한다는 아쉬움이 참모들 입에서 탄식처럼 흘러나온다.

노 대통령의 성북을 재보선 출마 권유를 거부했지만, 보다 강력한 카드를 꺼냈어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 오히려 정동영이 노무현을 끝까지 끌어안았어야 한다는 반론도 있다.

'선 긋기'와 '끌어안기'에서 끊임없이 고민한 게 결국 '개혁'과 '중도' 양쪽 모두를 놓치는 상황을 낳았다는 것이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은 또다른 배경이다.

30%에 채 못 미친 대선 득표율은 앞으로 두고두고 정동영의 '아킬레스 건'이 될 가능성이 높다.

당내 경선 과정에서 '이전투구'를 벌였던 친노(親盧) 세력과 친손(親孫) 세력은 '임시 아군'에서 또다시 '적군'으로 다가설 것이다.

'대패 책임론'을 잠재우기에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릴 지도 미지수다. 어쩌면 '재기'의 타이밍은 오지 않을 수도 있다.

모든 걸 '참여정부'에 돌리기엔 유권자에 대한 정동영의 '흡인력' 자체가 부족했다는 아픈 지적도 나온다.

그러나 2007년 '기적'이 없었다고 해서 정동영의 '기회'마저 사라졌다고 보긴 아직 섣부르다.

정전 협정이 체결되던 1953년 7월 27일생. '평화 협정 체제'를 숙명으로 여기는 그의 나이는 이제 54세다.

정동영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나라와 국민을 위해 항상 국민들과 함께 하겠다"고 했다.

자신의 개인 홈페이지에는 "국민 여러분을 존경하고 사랑한다"며 "더 낮은 자리에서 한걸음 한걸음 다시 시작하겠다"고 했다.

선거가 끝난 날, 정동영은 다시 '시작'을 시작했다.

2007-12-20 오전 12:4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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